인도네시아, 짓던 교회는 파괴되고 교인은 폭행 당하고

이슬람 시위자들이 교회를 향하여 다섯 차례나 시위를 겸한 공격을 벌여 10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서부 자바의 교회 지도자들이 경찰에 대해 엄정한 법집행을 촉구하고 나섰다. 바탁 크리스천 프로테스탄트 필라델피아교회 성도들 20 명 가량은 교회가 시케팅에 보유하고 있는 땅에 주일 옥외 예배를 위해 모였다. 이 때 300 명 가량의 이슬람민족포럼과 이슬람수호전선 소속 군중들이 모여들어 경찰이 쳐 놓은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고 난입하여 교인들에게 예배를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교인들은 이를 거부했고, 군중들은 교인들에게 곤봉과 돌, 그리고 주먹까지 동원하여 폭행을 가했다.

자카르타포스트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사건을 포함해서 다섯 차례에 걸친 교회에 대한 공격이 있었으며, 공격에 참여한 총참여 인원은 1,500 명에 이른다. 현지 방송인 메트로 트레베에 의해 촬영된 동영상 화면을 통해서도 대규모의 군중들에 의한 폭행 장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세타라민주평화연구소의 연구원인 인디라 리스티안타라는 언론은 공격자들을 현지 주민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베카시지역의 이슬람민족포럼 소속이 맞다고 말하면서, 비디오 화면을 통해 이 단체의 지역 책임자인 무르할리 바르다의 모습도 포착되었다고 말했다.

현장 상황을 전하는 목격자들은 교인들이 이들의 폭행에 못이겨 해산하겠다고 했지만,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고 전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된 공격을 받으면서 프랭키 타움부난(26)이라는 교인이 폭행을 당하던 아버지를 보호하려다가 심한 발길질을 당해 부상을 입었고, 베를리아나 시나가(22)라는 교인도 머리와 얼굴에 자상을 입었다. 사건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경찰 책임자인 이만 수기안토는 경찰에 교회 측에게 이웃들에게 방해가 되니 예배를 하지 말 것을 경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강행한 것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교회 측은 이번 폭력사태를 주도한 두 단체에 대해 종교에 대한 차별과 폭력 등을 이유로 고발했다. 이 교회의 루스피다 시?준탁 목사는 또 베카시 행정당국에게 교회가 안전하게 예배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주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교회는 그 동안 교회가 확보하고 있는 땅에서 건물이 없는 채로 노상 예배를 드려왔다. 그 이유는 이미 이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폰독 티무르에 있는 교회 건물에 대해 행정당국이 봉인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소규모의 모임을 이어 가다가 1998년에 시케팅 지역에 교회를 짓기 위해 땅을 구입했다. 그러나 200년 11월에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는 건물에 수 백 명의 이슬람 신자들이 난입해 불을 지르고 건물을 파괴하는 등 수난을 당해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2007년에는 폭독티무르의 주거 지역에 임시 예배 처소로 사용하기 위한 가옥을 구입하는 한편 시케팅의 교회 건물 건축을 위한 정식 건축허가 서류를 접수 시켰다. 그러나 이 건축허가 요청서류는 현재까지 허가도 반려도 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또 이슬람 측은 폰톡티무르의 임시 예배 처소에 대해서도 계속 훼방을 부려 왔다. 이에 지난 2009년 10월에는 교회 측이 베카시 지역의 부시장인 제잘렌 자야의 허가를 얻어 시케팅의 교회 건립 부지에서 노상예배를 가져 왔다.

그러나 이 마저도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심한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입장이 곤란해진 행정당국은 교회 부지의 건축 허가를 기각 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다시 폰독티무르의 임시 예배 처소에서 모이기 시작하자 지난 6월에는 이에 대해 봉인조치를 취했다. 교회 측이 강력히 항의하자 목타르 모하마드 시장은 경찰을 파견하여 이들의 노상예배에 대한 안전은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경찰의 갈팡질팡 행보는 계속되었다. 일부 경찰은 교회의 예배를 보호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쳐주고 경비도 서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공격이 있기 하루 전날 자카르타의 주지사와 경찰총장이 이슬람 과격단체인 이슬람민족전선의 창설 1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바로 그 다음날 이슬람민족전선에 의해 교회에 대한 공격이 발생한 것이다.


알제리, 살라피파 이슬람 득세 확연(1)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이에서 아무 서점이라도 들어간다면, “서방세계에 대한 우리의 싸움”, “살라피스트의 원칙에 입각한 지하드” 등 호전적인 제목의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동안 알제리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슬람의 분파인 살라피파의 활동이 활발해 지고 있다. 살라피파란 이슬람 안에서도 초정통보수주의를 지향하는 분파이다. 일관되게 세속국가를 지향하며, 이슬람을 표방한 무력과 폭력을 철저하게 금지해 왔던 나라임을 감안 한다면, 위기 상황이고, 특이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에 알제리를 휩쓸었던 내전과 폭력사태의 와중에서 대부분의 살라피파 신자들은 다소 비껴나 있었다. 또 상당수의 살라피파 신자들은 정부와 손을 잡고, 내전에 참여하고 있는 세력들의 무장해제를 위해 설득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살라피파는 정교의 분리를 교리화 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기득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폭력적, 혹은 정치적인 방법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 알제리에서 살라피파의 영향력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도 금방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전개는 정치와 경제에도 암암리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알제리의 정치분석가인 마흐무드 벨히메르는 “이러한 움직임이 이미 전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세속주의에 익숙해진 사회와 정부와도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살라피파의 뿌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와하비즘이 좀더 타협 없는 모습으로 알제리에 토착화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올초, 정부에서 여성들의 여권사진촬영을 할 때, 히잡을 벗도록 한 조치에 대해 살라피파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그 세력을 과시했다.

온몸을 둘러싸는 흰색 옷과 턱수염은 살라피파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일종의 시민 운동의 형식을 통해 전국의 상점들이 담배나 술 등을 팔지 못하도록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살라피파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살라피파 성직자들이 최근 들어 정부 내의 종교사무부가 관장하는 회의나 기구에 일정한 자리를 얻게 되었고, 이들은 정부가 주최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알제리 국가가 연주될 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조차 거부하고, 이를 언론이 크게 보도한 것이다.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인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살라피파의 성장을 정부가 도와준 측면이 어느 정도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알카에다 등 이슬람 무장세력을 단속하기 위해 늘 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면서도 비폭력, 비정치를 지향하는 집단이 살라피파이다. 정부는 무장단체를 대상으로 심리전을 벌이고, 나가서 이들이 무기를 내려 놓도록 설득하는데 살라피파를 매우 효과적으로 써먹었다.

이런 특별한 환경 때문에 알제리 정부는 중동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살라피파에 대해 매우 관대했다. 한 서방 외교관들은 이집트에서 살라피파 사람들이 자신이 살라피파 임을 드러내는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한다면 바로 경찰에 의해 연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알제리는 1990년대 초중반기를 내전으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 반군과 정부군 합쳐서 20만 명이 사망했다. 결국 정부는 살라피파의 도움을 청했고, 살라피파를 매개로 한 선무 작업과 대화를 병행한 결과 반군세력은 눈에 띠게 줄었다.

지금도 반군의 활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몇 년 간의 통계를 보면 그 어느 시절보다도 무력 충돌과 인명피해가 줄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정부분 살라피파의 덕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처럼 정부와의 밀월은 살라피파의 성장을 가져왔고, 이는 거꾸로 사회와 정부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살라피파 소속의 한 이슬람 성직자는 자신들이 알제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므로 살라피의 성장을 그렇게 경계심을 품고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경계심은 살라피파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들이 살라피파를 왜곡 선전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서방 국가 정부들이 그들의 외교적 이익을 위해서 살라피파를 왜곡했고, 정부에 대해서 살라피파를 견제하거나 혹은 분쇄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살라피파가 가장 순수한 이슬람의 분파이고, 이슬람의 원조이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서구 유럽 사회에서는 경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이크 아브델페타 제라오우이라는 이름의 살라피파 성직자는 “살라피파는 정치적 야심이 없다. 다만 사회를 변혁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오염된 순수 이슬람 문화를 회복하여 진정한 이슬람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우디, 귀신들렸다며 아들 6년간 지하실에 결박한 아버지


SSI_20100723075750_V.jpg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릇된 종교적 신념으로 아들이 귀신이 들렸다고 믿고, 6년 동안이나 손발을 체인으로 묶어 지하실 방에 감금했던 아버지의 일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마카 라는 지역에 살고 있는 터키(29)라는 이름의 남성이 거의 혼수상태로 지하실에서 발견된 것이다. 터키의 아버지는 아들이 온몸에 경련이 일고, 몸을 비틀고 흰자위가 드러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여자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이 지니라는 여자라고 주장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 이슬람 사원에 데리고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이슬람 사원의 성직자들도 아들의 모습에 기겁을 했는데 한 성직자가 아들을 체인으로 묶고 코란을 읽어주라는 충고를 하여 그대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6년이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볼 때 터키의 증상은 정신질환 같고 이는 유전일 가능성도 있다. 터키의 아버지 역시 9살 이후 40년 동안이나 여자 귀신을 보아 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음 알 카라 대학교의 모하메드 알 수하리 교수 등 사우디인권위원회 관계자들이 진상을 확인하고 터키가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부탄, 개종금지 입법 추진


부탄 의회가 국민들의 개종을 금지하고 개종을 처벌하는 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이 법안은 “강압이나 다른 형태의 유도행위를 사용해 개종하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모호한 문구로 작성되어 있다. 인도의 반개종법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계 단체들이 의료, 교육, 구호 활동을 벌이는 길을 차단하고, 이들을 통해 기독교를 국민들이 접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이 법안을 제안한 이는 부탄 의회 의원이자 입법부 의장인 쿠엔라이 체링 의원은 이 법률 개정안이 부탄 헌법 제7항 4조의 “부탄 시민은 생각, 양심, 그리고 종교 자유의 권리를 가진다. 그 누구도 강압이나 유인의 수단으로 다른 신앙에 속할 것을 강제되지 않는다”는 조항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불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의 개종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하에서 비밀리에 신앙공동체를 유지해가고 있던 부탄 지하교회들은, 개종 금지 법률 움직임이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정부 박해가 전개될 전조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푸나카(Punakha)의 한 목회자는 교인 중 한명이 지난 1월 집을 건축하던 중 그 건물이 교회로 사용된다는 헛소문이 퍼진 후 지어지고 있던 건물이 파괴되는 사고를 겪었다며, “부탄 정부의 개종 금지 법률 제정 움직임이 반기독교 정서 확산으로 이어지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밝혔다.


미전도종족 Profile(인도네시아)

Komering People 코메링족

"모이기만 하면 사고친다."  인도네시아인들이 코메링족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수의 폭력과 범죄 행위 때문에 코메링족 전체가 해안지대 주민들로부터 이렇게 따돌림을 받으며, 폭력적이고 흥분하기 좋아하는 족속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쓰고 있다.  한 코메링족 블로거는 "우리에 대한 이런 불명예 스런 평판은 우리 모두를 힘들게 만든다."고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그러나 코메링족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들은 의외로 질서 있는 사회를 유지하고 있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종교성도 가지고 있다.  또 외지인들에게도 우호적이고, 노인들을 공경하는 문화도 있다.  그들의 종교적 문화를 분석해 보면 코란의 가르침과 두쿤이라고 부르는 샤먼니즘 문화가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코메링족은 수마트라 남동부 해안에 살고 있다.  그들의 1/3 가량은 매우 가난하며, 의료적인 서비스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며, 식수도 부족하고, 교육의 기회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